본인(淰)은 경상도 관찰사가 되어 집을 떠날 때 아버님(柳廷亮)께서 족보(族譜) 초고(草稿) 한 권을 주시며 이것은 우리 집안의 족보라고 하시면서 나의 할아버님(영의정 류영경)께서 생전에 족보를 펴내지 못한 것을 늘 걱정하시었는데 신변의 화(禍)가 계속되어 미처 족보 발간의 뜻을 이루지 못하신 것이 평생에 한이 된다고 하셨다.
今汝奉命于朝出按嶺南嶺南卽吾先朝直提學及永興公之墓所在也榮禮福州之間亦多 금여봉명우조출안영남영남즉오선조직제학급영흥공지묘소재야영예복주지간역다 吾宗人有若上舍希潛元立曁稷卽嶺之韻士也吾先世事蹟必記之詳矣 오종인유약상사희잠원립기직즉영지운사야오선세사적필기지상의 이제 네가 조정의 명을 받아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하게 되었으니 영남은 우리 선조 직제학공(류극서)과 영흥공(류빈)의 묘소가 있으며 안동, 영주 봉화지방에는 우리 종친들이 많이 살고 있고 특히 진사 류희잠(柳希潛), 류원립(柳元立) 및 류직(柳稷) 등은 영남의 문장으로 선조의 사적을 반드시 기록하고 잘 알고 있을 것이다.
汝其簿書之餘邀此三人參考校讐命工入梓則先志可成吾門之幸孰有大於此乎汝其勉 여기부서지여요차삼인참고교수명공입재즉선지가성오문지행숙유대어차호여기면 之淰承敎而南莅事之翌日以書邀三人三人者至則道先世事頗詳密袖出一帙書亦吾門 지심승교이남리사지익일이서요삼인삼인자지즉도선세사파상밀수출일질서역오문 草譜 초보 네가 공무(公務) 중 여가에 이 세분을 만나 의논하면 목각을 파는 사람을 구하여 뜻을 이루게 될 것이니 우리 가문(家門)에 이보다 더 큰일이 또 있겠느냐. 너는 이 일에 힘을 쓸지어다”라고 하시었다. 아버님의 명을 받은 나는 부임한 다음 날에 이 세분들에게 연락하여 만나 보고 선조의 사적을 의논하니 옷소매에서 책 한 권을 내어놓았다.
以代系源派亦加詳盡遂發書遍告于遠近同宗收聚各派子姓與外裔仍與三人相考証不 이대계원파역가상진수발서편고우원근동종수취각파자성여외예잉여삼인상고증불 閱月書成而鋟訖 열월서성이침흘 이 또한 우리 가문의 초보(初譜)로서 세계(世系)와 연원(淵源)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서 종원(宗員)들에게 널리 알려 각파의 후손과 외손을 수단하고 이에 세사람과 같이 서로 고증하여달을 안 넘겨 족보 원고가 완성되니 목판에 글을 새기기에 이르렀다.
嗚呼人之有宗猶木之有根水之有源古今世族之家必有譜牒者尊祖重宗而明人倫視敦 오호인지유종유목지유근수지유원고금세족지가필유보첩자존조중종이명인륜시돈 睦之義也惟我姓氏從羅歷麗至大承而起於儒州 목지의야유아성씨종라역려지대승이기어유주 아! 사람의 종친이란 나무의 뿌리와 물의 근원과 같을 진대 예로부터 세족(世族)의 집안에는 반드시 족보가 있어서 조상을 높이 받들고 종친을 소중히 여기며 인륜(人倫)을 밝히고 화목(和睦)하는 큰 뜻을 보여 주었다. 우리 성씨는 신라를 거쳐 고려에 이르러 대승공(류차달)께서 문화(유주)에서 일어났고,
至掌令今而興於完山自完山于玆三百年所簪組相繼爲國大姓世篤家風相與輯睦而譜 지장령금이흥어완산자완산우자삼백년소잠조상계위국대성세독가풍상여집목이보 牒之成成於今日吁其亦有待而然耶吾曾大父之志庶幾不墜而 첩지성성어금일우기역유대이연야오증대부지지서기불추이 장령공(류습)에 이르러 완산의 전주류씨로 그 자손이 크게 번창하여 300여년을 두고 높은 벼슬을 하며 대대로 영화를 누리면서 나라의 큰 성씨가 되었다. 대대로 가풍이 인정이 두텁고 서로 간에 화목하게 지내 오다가 이제야 족보를 간행하게 되었다. 아! 이때를 얼마나 기다렸던가. 나의 증조부 뜻이 거의 이루어 졌도다.
淰且歸而有辭於家庭私心之幸夫豈淺淺乎哉後世之廣其流布永其不朽불忝吾宣祖積 심차귀이유사어가정사심지행부개천천호재후세지광기류포영기불후불첨오선조적 德餘烈者庸詎知非吾子孫中人耶願與諸宗人相勉而又勉繼此者於無窮云 덕여열자용거지비오자손중인야원여제종인상면이우면계차자어무궁운 歲壬辰七月日 後裔孫通政大夫守慶尙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淰再拜謹叙 세임진칠월일 후예손통정대부수경상도관찰사겸병마수군절도사순찰사심재배근서 본인(류심)은 이제 집에 돌아가 아버님께 족보 발간의 기쁜 소식을 전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기쁘도다. 후대에 널리 전하여 선조께서 쌓으신 덕과 빛나는 업적을 영원히 더럽히지 않게 하면 어찌 우리 자손 가운데 이를 이어나갈 후손이 없으리요. 바라건대 우리 종친들은 서로 힘쓰고 또 힘써서 자손들이 무궁하도록 할 지어다. 1652년 7월 후손 통정대부 경상도관찰사겸병마수군절도사순찰사 류심은 재배하고 삼가 쓰노라.
2. 舊丙午譜叙 구병오보서 (1727년) 서문이 없다.
3. 再丙午譜叙 재병오보서 (1786년)
吾宗舊有一冊全平君按嶺臬時剞劂者也後七十五年丙午宗丈選氏又重修於平昌任所 오종구유일책전평군안령얼시기궐자야후칠십오년병오종장선씨우중수어평창임소 成四冊譜例漸備今至六十年子孫益繁而昌增修之擧又可己乎諸宗相與謀之久矣 성사책보예점비금지육십년자손익번이창증수지거우가기호제종상여모지구의 우리 종친은 오래된 한 권의 족보가 있었는데 전평군(柳淰)이 영남관찰사로 있을 때 간행한 것이다. 그 후 75년이 지나 영조2(1726)년에 종중의 어른 류선(柳選)씨가 평창의 임지(任地)에서 다시 고쳐서 4권의 족보를 갖추게 되었고 60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 자손이 더욱 번창하여 증보(增補)할 것을 여러 종친이 함께 논의한지 오래되었다.
義養適守安東府始克鋟梓亦丙午歲也譜例皆遵舊不敢改而註錄稍詳之凡十冊始以一 의양적수안동부시극침재역병오세야보예개준구불감개이주록초상지범십책시이일 冊而爲四冊四冊而爲十冊後又有繼之者則將不知至於幾十冊也吾宗勉之哉 책이위사책사책이위십책후우유계지자즉장불지지어기십책야오종면지재 류의양(柳義養)은 안동부사가 되어 다시 출판하니 병오보(1786년)이다. 이 족보는 감히 고친 것은 없고 옛 족보를 기본으로 주록(註錄)을 상세히 하여 모두 10권으로 하였다. 1권이 4권이 되고 4권이 10권으로 되었으니 뒷날에 또 이어지게 될 것이니 장차 몇 십 권이 될지 알 수 없도다. 우리 종친들이어 힘쓸지어다.
我先祖全平君壬辰譜 吾門譜牒之始也 首書柳邦直高麗諸道都副丞 子橒高麗生員 아선조전평군임진보 오문보첩지시야 수서류방직고려제도도부승 자운고려생원 書其下曰 此以上皆系出文化 高麗大丞車達之後也 서기하왈 차이상개계출문화 고려대승차달지후야 나의 선조 전평군(全平君, 柳淰)의 임진년(1652년)족보가 우리 문중의 최초족보이다. 머리에 “류방직(柳邦直)은 고려제도도부승이고 그 아들 운(橒)은 고려생원이다.”라 기록하고 그 아래에 이르기를 “이 이상은 모두 문화에서 이어 나왔으니 고려 대승공 류차달(柳車達)의 후손이다”라 하고
奕世冠冕爲國大姓不幸失傳不能繼代至諱濕移居全州因貫其邑子孫以爲始祖譜旣成 혁세관면위국대성불행실전불능계대지휘습이거전주인관기읍자손이위시조보기성 宗中諸博洽掌故者通考文化晋州譜及姓苑雜出之書則自文化分貫之說謬誤不可徵信 종중제박흡장고자통고문화진주보급성원잡출지서즉자문화분관지설류오불가미신 “대대로 벼슬이 이어져 나라의 큰 성씨가 되었으나 불행히도 전해지지 않아 대를 잇기가 불가능하고 류습(柳濕)에 이르러 전주로 옮겨 살아 그 읍호를 본관으로 삼고 자손들이 습을 시조로 삼았다”는 족보가 이미 이루어져 있으나 종중에서 박식(博識)하고 고사(故事)에 밝은 분들이 문화와 진주류씨 족보 및 다른 성시 족보에 여러 가지로 나오는 문헌을 살펴보니 문화류씨로부터 분관되었다는 설은 잘못되어 가히 믿을 수가 없다.
盖其說出於嶺南藏晋州譜以訛襲訛轉轉相誣壬辰譜成嶺嶺營校正之人多是嶺南宗人 개기설출어영남장진주보이와습와전전상무임진보성영영영교정지인다시영남종인 故北譜首之書也 고북보수지서야 그 말은 영남지방에서 나온 곳으로 추측되는데 간직해 온 진주류씨 족보의 잘못된 것이 다시 거듭되고 변하고 변하여 서로 꾸몄으며, 임진보도 경상도 감영(監營)에서 이루어졌으니 교정하는 사람이 영남의 일가가 대부분이었으므로 이 족보의 머리에 쓴 것이다.
僉正公錫昌與府使冕府使曼乃爲文以誘各派而辨之甚力故曁後第二譜第三譜遂闕譜 첨정공석창여부사면부사만내위문이유각파이변지심력고기후제이보제삼보수궐보 首之書也然則我柳不必曰本源於文化也不必曰伯仲於晋州也而首足全州之柳也 수지서야연즉아류불필왈본원어문화야불필왈백중어진주야이수족전주지류야 첨정 류석창(柳錫昌)이 부사 류면(柳冕) 및 부사 류만(柳曼)과 함께 글로서 각파(各派)를 깨우치고 밝히는데 온 힘을 썼기 때문에 그 후의 제2보(병오보)와 제3보(재병오보)에는 마침내 족보 앞머리의 글을 뺀 것이다. 이렇게 되니 우리 전주류씨는 반드시 문화가 본원이라 할 수 없고 진주류씨와 형제라고도 할 수 없으니 몸체는 바로 전주류씨인 것이다.
全州之柳顯於麗代者亦多焉有若平章事貞簡公柳邦憲平章事載肅公柳光植平章事莊 전주지류현어려대자역다언유약평장사정간공류방헌평장사재숙공류광식평장사장 定公柳韶俱載史傳及輿地勝覽今其子孫無傳焉 정공류소구재사전급여지승람금기자손무전언 전주류씨 중에서 고려 때에 현달(顯達)한 분이 역시 많았는데 평장사 정간공 류방헌(柳邦憲), 평장사 대숙공 류광식(柳光植), 평장사 장정공 류소(柳韶)와 같은 분은 모두 고려사열전과 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으나 그 자손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我祖之於全州其爲移居與世居固不可知盖與三平章家同邑而同貫則人或疑之以南阮 아조지어전주기위이거여세거고불가지개여삼평장가동읍이동관즉인혹의지이남완 北阮然可往杞宋文獻之歎也 북완연가왕기송문헌지탄야 우리 시조(류습)가 전주에 이사를 가서 살았는지 전부터 대대로 살아온 것인지는 참으로 알 수가 없으나 대개 3인의 평장사 집과 더불어 같은 읍(邑)이고 본관도 같다면 사람들이 혹 의심하기를 빈촌(貧村)과 부촌(富村)의 류씨(柳氏)라 할 것이니 어찌 약소국(弱小國)인 기(杞)나라와 송(宋)나라가 문헌을 보존치 못한 것을 탄식하겠는가.
昔狄武襄不敢附狄梁公凡譜系失傳之家當引狄武襄爲第一義也今當第四譜修正之日 석적무양불감부적량공범보계실전지가당인적무양위제일의야금당제사보수정지일 始祖完山伯十九世孫副司果南珪謹撰識之時蒼龍丙子夏 시조완산백십구세손부사과남규근찬식지시창룡병자하 옛날에 같은 적씨(狄氏)인데 가난한 적무양 청(靑)의 집안이 부자인 적양공 인걸(仁傑)의 집안에 감히 끼지 못했으니 보계(譜系)를 잃은 집안에서는 마땅히 적무양의 고사(古事) 인용이 제일 옳은 길이다. 이제 네 번째 족보를 수정하는 날에 시조 완산백 19세손 부사과 류남규(柳南珪)가 삼가 기록하여 알리니 때는 고종13(1876)년 여름이다.
5. 甲子譜叙 갑자보서 (1924년)
源深流長淮水不絶根盤葉奕泰山爲盟噫全州之柳同出於完山伯而世代旣遠雲仍漸繁 원심류장회수불절근반엽혁태산위맹희전주지류동출어완산백이세대기원운잉점번 分而爲各派散而處各地喜慶哀問之有不相及 분이위각파산이처각지희경애문지유불상급 근원이 깊은 물은 길게 흘러 끊이지 않고 뿌리가 튼튼하면 잎이 무성하여 태산(泰山)이 된다. 아! 전주류씨는 완산백에서 나와 멀리 세대를 이어가 자손이 점점 번창하여 각파로 나뉘고 각지로 흩어져 살게 되었으니 기쁨도 슬픔도 어찌 없었으랴.
則蘇氏所謂至於途人者固勢之所不免然推本所自同是一源則記之譜冊名某字某某年 즉소씨소위지어도인자고세지소불면연추본소자동시일원즉기지보책명모자모모년 月日生卒某官爵某卿邑無不備載披之几案常常目接猶同居共㸑也 월일생졸모관작모경읍무불비재피지궤안상상목접유동거공촌야 소동파(蘇東坡)가 말한 바와 같이 나그네가 된다는 것도 바로 이런 것이며, 세력이 단단해지면 한 가닥 자기의 근본을 추구하는 것은 면할 수 없는 것이다. 족보에 이름, 자(字), 생졸년월일과 벼슬을 기록하는데 어느 고을에서 준비가 안 되었다든지 책상에서 찟겨져버려 등재되지 못하는가 하면 항상 얼굴을 맞대고 같이 산다.
其視之異姓殊屬詎不有別自親厚者乎此精之所不能己而此今日合族尊祖而第五回大 기시지이성수속거불유별자친후자호차정지소불능기이차금일합족존조이제오회대 同譜之所以修正也舊有自文化移貫之說爲後來疑案者 동보지소이수정야구유자문화이관지설위후래의안자 그러나 다른 성을 보듯이 하니 어찌 유별나지 않으며 친후(親厚)의 정이 솟아나리요. 이제 모든 종족이 합하여 다섯 번째 수정대동보를 만드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구보(舊譜)에는 문화에서 이관(移貫)한 것을 후에 의심하는 분도 있었다.
實由於文獻之不足而豈非問瓞難稽尋源莫睹者耶昔全平君時壬辰譜實吾柳譜冊之始 실유어문헌지부족이개비문질난계심원막도자야석전평군시임진보실오류보책지시 而歷世修譜一冊四冊十冊去丙子十七冊而今爲冊 이력세수보일책사책십책거병자십칠책이금위책 그러나 사실을 고증할 문헌이 부족하여 상세히 고찰하기 어려우니 어찌 하리요. 옛날 전평군(류심) 때의 임진보가 실제 우리 류씨족보의 시작인데 세대를 두고 1권으로 4권으로 10권으로 수보(修譜)를 거듭하다가 지난 병자년에 17권으로 지금은 (23)권으로 완성하게 되었다.
嗚呼休哉吾祖垂裕之澤愈久愈新而於追遠報本之韶根敦睦之誼勿替引之以至乎無 오호휴재오조수유지택유구유신이어추원보본지성동근돈목지의물체인지이지호무 窮則吾柳之幸孰大於是吾宗勉之哉 궁즉오류지행숙대어시오종면지재 아! 우리 조상들께서 끼쳐주신 덕이 오래도록 새로워 조상의 덕을 추모하여 제사를 지내고 자기의 태어난 근본을 잊지 않고 은혜를 갚는 정성으로 같은 뿌리의 화목(和睦)하는 정다움을 변치 않고 무궁하게 하였으니 우리 류씨문중의 다행이며, 더욱 닦고 닦는데 우리 종친이 힘쓸지어다.
本之譜冊推之大同孝弟之心詎不有油然者乎吾宗勉之哉譜冊凡例旣有由仰紹述而顧 본지보책추지대동효제지심거불유유연자호오종면지재보책범례기유유앙소술이고 今譜牒之告厥亶於諸宗爲先之誠而至於費省而事竣就速而功成則永熙晥兩氏之勞爲 금보첩지고궐단어제종위선지성이지어비성이사준취속이공성즉영희환양씨지노위 多古之待其人而行者政謂此也 다고지대기인이행자정위차야 이 족보를 높이 받들면 화평하게 부모와 형을 섬기는 마음이 유연하게 일어날 것이니 우리 종친이 힘쓸지어다. 이 족보의 범례에 유래를 상세히 적었으며, 이 족보가 모든 일가들이 선조를 받드는 정성으로 비용이 마련되고 속히 완성되었으니 영희(永熙), 환(晥)씨 두 분의 많은 노고를 치하 드리는 바이며, 옛것을 이어 행하면 바르게 될 것이다.
閼逢困敦重陽節 春湖公十三代祀孫 前參奉 長熙謹書 알봉곤돈중양절 춘호공십삼대사손 전참봉 장희근서 1924년 9월 9일 춘호공 13대 사손 전참봉 장희(長熙)가 삼가 쓰다.
6. 丙辰譜序 병진보서 (1976년)
족보는 이미 중국육조(中國六朝) 시대에 이루어졌다 하거니와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명종 때 문화류씨의 보(譜)가 효시(嚆矢)로 알려져 있다. 전주류씨와 문화류씨의 상계(上系) 내용(은) 구보(舊譜)에 밝혀있어 이에 생략하거니와 전주류씨 보첩(譜牒)의 창간은 임진(壬辰:1652)년으로서 전평군(全平君 : 류심)을 위시한 직(稷), 희잠(希潛), 원립(元立)의 공이 지대(至大)한 것으로 경상 감영(慶尙 監營)에서 간행되었으니 단권보(單卷譜)이다. 그 후 75년만인 병오(丙午:1726)에 선(選)께서 강원도 평창 임소(任所)에서 꾸미시었으니 사권(四卷)으로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60년만인 병오(丙午:1786)에 의양(義養)께서 안동부 임소(任所)에서 십권(十卷)을 꾸미시었다.
90년만인 병자(丙子:1876)에 남규(南珪)께서 17권의 보첩을 간행하시었다. 그 후 여기저기 각파에서 파보는 간행되었으나 대동보는 이에 꼭 백(百)년 만에 꾸미게 되었다. [ 주) 병자보를 간행한지 48년 후 1924년에 영희(永熙)씨가 갑자보를 23권을 서울에서 간행하였는데 이를 모르고 100년 만에 꾸민 것이라고 한 것 같다]
십(十)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하는데 하물며 백년이란 장구한 세월에 있어 서랴! 조선의 쇠망은 일제통치의 굴욕을 가져왔고 8․15광복의 기쁨은 동시에 6․25의 참화를 가져왔다. 혼란과 전화(戰禍)의 여독(餘毒)은 인심을 각박하게 만들어 자연 존조돈족(尊祖敦族:조상을 존경하고 동족끼리 화목하게 지내는 것)의 정신이 희박하여 졌다. 피란(避亂)과 유리(流離)의 생활은 거소(居所)의 변동과 통신의 두절(杜絶)을 초래하여 종친 상호간의 왕래도 끊어지기 일수였다. 이대로 가다가는 선대에 힘써 만드신 족보의 정신을 후세에 전승(傳承)시키기 어려움을 통감(痛感)한 나머지 하루속히 전국에 산재(散在) 유리(流離)된 수많은 종원(宗員)들을 규합 정리할 필요성을 뜻있는 종친들은 입을 모아 이야기해 온지 오래였었다.
다행히도 거년(去年:1975 을묘) 봄 고산(高山:전북 완주군) 향사(享祀) 때 종의(宗議)를 모아 이에 제오차보(第五次譜:제6차보가 맞는다)를 간행하게 되었다. 아직 통일의 비원(悲願)은 이루어지지 못한 채 북한땅 여기저기 수많은 동족들이 이 기회에 한데 모아 보첩을 같이 할 수 있는 기쁨을 나눌 수 없음은 유감 천만(遺憾千萬)의 일이어니와 전국 각지에서 요원(燎原:들을 태우는 불길)의 불길처럼 솟아오르는 종친애(宗親愛)는 마침내 심산벽지(深山僻地)에서 절해(絶海:바다 건너) 낙도(落島)에서 그간 소식이 단절되었던 종친들까지 수단(收單:각자의 족보 원고를 거두는 것)이 쇄도하여 보첩의 크기(가) 처음 3권으로 예상하였던 것이 5권으로 확대 되였으며 처음 4천여엽(頁:쪽) 예상이 5천여엽(쪽)을 훨씬 넘게되어 이 많은 종친들이 전국 각처에 맹활약하고 있음을 생각하고 이제 한자리에 모여 이 뜻 깊은 보첩을 간행하게 되니 즐겁고 흔쾌(欣快)한 일이 이 이상 더 큼이 없다. 이 뜻 깊고 거창한 일을 수행함에 있어 서울의 경수(慶秀), 안동(安東)의 세희(世熙), 전주(全州)의 광근(光根) 제씨(諸氏)가 각기 그 지방의 종친을 대표하여 특히 수고가 많았고 전주(全州) 기정(琦諪)씨와 여수 두일(斗日)씨의 물심양면(物心兩面)의 커다란 협조는 크게 도움된 바 있다. 때마침 음(陰) 십월중정(十月中丁) 국대부인(國大夫人) 향사(享祀)를 기하여 이 대동보가 간행(刊行) 배포(配布)하게 됨을 이중(二重)의 기쁨으로 생각하며 다시 한번 열렬히 성원(聲援) 협조해 주신 전국의 종친 여러분께 감사 드리며 아울러 이번 대동보(大同譜) 간행을 계기로 모든 종친들은 더욱더욱 선대(先代)의 유훈(遺勳)과 유덕(遺德)을 받들어 오직 존조목족(尊祖睦族:조상을 존경하고 동족끼리 화목하게 지내는 것)하여 기리 영광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1976년 병진 10월일 전주시 인후동 시사재(時思齋)에서 18세손 청(靑)은 삼가 쓰다.
7. 壬辰譜跋 임진보발 (1652년)
嗚呼 宗法之不講也久矣宋時有眉山蘇明允者慨然行之乃曰觀吾譜者孝悌之心油然而 오호 종법지불강야구의송시유미산소명윤자개연행지내왈관오보자효제지심유연이 生矣旨哉言乎敦本之意孰加於此 생의지재언호돈본지의숙가어차 아! 종파의 법규를 알리지 않은지 오래 되었구나. 송나라 때 모산 송명원이 탄식하면서 행하고 말하기를 “우리 족보를 보는 사람은 효도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뭉게뭉게 일어날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그 뜻을 말한다면 근본을 돈독케 하는 뜻이니 무엇이 이보다 더 하겠는가. 嘗推類而觀之樹木之於枝葉江海之於派流雖有千萬之殊而本之則同至於人也何獨不 상추류이관지수목지어지엽강해지어파류수유천만지수이본지즉동지어인야하독불 然始爲一人之身者非本源也耶逮自兄弟而分者非枝葉也 연시위일인지신자비본원야야체자형제이분자비지엽야 일찍이 유추해 본다면 수목의 가지와 잎 및 강과 바다의 파류(派流)가 비록 다름이 많다고 하나 그 근본은 같은 사람에게 이르니 어찌 홀로 아니라 하리요. 처음에 한 사람의 몸에서 시작되었으니 근원이 아니겠는가. 형제로부터 나누어지는 가지와 잎이 아니겠는가.
耶繼姓者宗統也出嫁者外裔也代系之綿遠族儻之蔓延而遂至於自親而疎自近而遠漸 야계성자종통야출가자외예야대계지면원족당지만연이수지어자친이소자근이원참 疎漸遠宗緖無統吉凶與慶弔情禮不相及則幾何其不爲行路人也 소참원종서무통길흉여경조정예불상급즉기하기불위행로인야 성을 이은 사람은 종통(宗統)이오 출가한 사람은 외예(外裔)이다. 대와 계촌이 멀어지고 종족이 뻗어나면 드디어 친한 데서부터 먼 데로 이르고 가까운 데서부터 멀어져서 점차 정분이 성기어지고 점차 멀어져 종족의 계통이 서지 않아 길흉과 더불어 경조사에 대한 정과 예가 서로 미치지 못한다면 어찌 그것이 길가는 사람과 같지 않으리요.
柳之受氏肇自文化高麗大丞公車達是爲鼻祖譜未得悉者失傳而不能繼也始祖掌令公 류지수씨조자문화고려대승공차달시위비조보미득실자실전이불능계야시조장령공 移貫於全州子孫仍家焉 이관어전주자손잉가언 류의 씨를 받음이 처음에는 문화의 고려 대승공 차달로부터이니 이분이 비조가 되시나 족보를 아직 갖추지 못한 것은 실전되어 능히 계대를 잇지 못했기 때문인데 시조 장령공께서 관(貫)을 전주로 옮겨 자손이 그로 인하여 가문을 이루었다.
其後子孫世有聞人仕宦多居於京師至全陽府院君而極榮盛流落而居於鄕者若安東豊 기후자손세유문인사환다거어경사지전양부원군이극영성유락이거어향자약안동풍 榮之族是己族序以之而疎遠居地又泛而隔閡 영지족시기족서이지이소원거지우범이격애 그 후 자손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사람이 있어 벼슬을 하니 서울에 많이 사는데 전양부원군에 이르러 크게 번영하였고, 고향을 떠나 타향에 살고있는 안동, 영풍의 일가가 있는데 족서(族序)가 소원하고 물위에 떠 닫히고 막혔다.
南阮北阮一盛一衰公藝之同居絶矣芳國之樂事難成盖由於族不講而譜不修吾宗之爲 남완북완일성일쇠공예지동거절의방국지악사난성개유어족불강이보부수오종지위 欠事如何哉 흠사여하재 이는 남완과 북완의 한번 번성하고 한번 쇠퇴함이니 공공의 법도로서 같이 삶이 끊어진 것이다. 어진 선비가 즐거운 일을 이룩하기 어려운 것은 대개 종족을 강론하지 않고 족보를 편찬하지 않은데 있어 우리 종중의 부족한 점이 되니 어떠한가. 주) 남완북완(南阮北阮) : 중국 진나라 때 완함과 완적 두 사람은 도(道)의 남쪽 빈촌에 살고 다른 완씨 들은 도의 북쪽 부자촌에 살아 같은 조상이면서도 빈촌의 완함과 완적은 남완, 부자촌의 완씨들은 북완이라 한데서 유래하는 말로서 빈부(貧富)의 차이로 혈통을 무시하고 사는데 따라 사람들의 평가가 다른 것에 비유한 말.
歲在壬辰春宗公淰氏按嶺節欲遂其曾大夫春湖相國之志卽以書遍諭于諸宗人使之各 세재임진춘종공심씨안영절욕수기증대부춘호상국지지즉이서편유우제종인사지각 修家牒以來 수가첩이래 효종3년(1652년) 봄에 종친인 심(淰)씨가 영남의 절도(節度) 벼슬을 받고서 그 증대부인 상국(영의정) 춘호(류영경)공의 뜻을 펴고자 바로 편지로서 모든 일가에게 알려 각기 가첩을 만들어 오라고 하였다.
自始祖以下至於苗裔攷其代系叙其親疎同宗則庶踐而不遺外波則曾孫以爲限井井有 자시조이하지어묘예고기대계서기친소동종즉서천이불유외파즉증손이위한정정유 條理裒爲一券極其祥證入之榟而壽其傳以爲門中家乘善乎 조리부위일권극기상증입지재이수기전이위문중가승선호 시조로부터 아래로 먼 자손에 이르기까지 그 대손의 가깝고 먼 순서를 정하고 일가는 서출이라도 버리지 않고 외파(外派)는 증손으로 한정하니 잇달아 조리 있게 모아 한 권이 되니 거기에 상세하게 고증을 하고 인쇄해 오래도록 그를 전하여 문중의 가승이 되게 하였으니 좋구나.
方伯相公之爲譜也其蘇氏之遺意乎明宗法於旣墜之後修代系不傳之餘使三百年未遑 방백상공지위보야기소씨지유의호명종법어기추지후수대계부전지여사삼백년미황 之擧幸而得成於今日親疎遠近臚列分疎俱載於一牒之上而擧知其所自出俾疎者而親 지거행이득성어금일친소원근려열분소구재어일첩지상이거지기소자출비소자이친 遠者而近尊祖之心敦宗之意藹然弸中而不自勝信乎 원자이근존조지심돈종지의애연붕중이불자승신호 방백(관찰사)과 상공(영의정)이 족보를 하심이 소씨가 남긴 뜻에 이르니 종파의 법규를 밝힌 것이 이미 쇠퇴한 뒤인데도 전하지 않는 나머지도 대계를 편집하여 3백년이나 하지 못한 일을 일으켜 오늘에야 이룩하게 되니 친소(親疎)와 원근(遠近)을 열로 벌려놓아 분별하여 모두 한 책 위에 실으니 손에 쥐면 그 스스로 나온 바를 알아 성긴 이는 친하게 되고 먼 이는 가까워져 존경하는 조상의 마음과 두터운 일가의 뜻이 온화하게 가득 차니 스스로 믿음을 이기지 못하겠구나.
孝悌之心油然而生者不誣也如是夫㮨與方伯同祖於參判公今爲六從之親而親而竭矣 효제지심유연이생자부무야여시부직여방백동조어참판공금위육종지친이친이갈의 幸以修系而投門下殆累日相接公遇之若一家之倫惓惓乎繼志述事款款乎敦宗睦族丁 행이수계이투문하태누일상접공우지약일가지윤권권호계지술사관관호돈종목족정 寧委曲可爲薄俗之勸 녕위곡가위박속지권 효도와 공경하는 마음이 뭉게뭉게 일어난다는 게 거짓이 아니 도다. 무릇 이와 같이 직(필자)은 방백과 더불어 참판공과는 선대 할아버님이니 같은 14촌 형제인 일가인데 있는 힘을 다하였다. 다행이 계보를 편찬하기 위하여 문하에 들어와 자못 여러 날 서로 접하니 공을 만난 것이 일가의 떳떳한 도리이며, 삼가 정성으로 뜻을 이어 충실하게 일을 한 것은 두텁고 화목한 친족으로서 정중하게 일의 성취를 바라고 가히 경박한 풍속을 따르지 않기 위함이다.
噫世德家聲方伯相公有焉古人有言曰宗法修而風俗厚又曰治譜與治國同凡我同宗克 희세덕가성방백상공유언고인유언왈종법수이풍속후우왈치보여치국동범아동종극 念修譜之意益篤仁親之心入孝出悌各盡其職貽謨垂範推極其効則所謂不出家而敎成 념수보지의익독인친지심입효출제각진기직이모수범추극기효즉소위불출가이교성 於國者其不在此歟 어국자기부재차여 아! 대대로 내려오는 덕과 집안의 명성은 방백과 상공이 있기 때문이다. 옛 사람의 말이 있으니 이르기를 종파의 법규를 닦으면 풍속이 천박하지 않다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족보를 바로 잡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것과 같다고 하였으니 우리 일가는 더욱 족보 정비의 뜻을 생각하고 더욱 어질고 사랑하는 마음을 돈독히 하여 들(入)면 효도하고 나(出)면 공경하여 각기 그 직분을 다하고 조상이 끼친 꾀의 모범을 보여 숭배하고 높이 받든다면 이른바 집을 나가지 않아도 나라에 도덕이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이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嗚呼世代遷移機會易失繼此而往更有佳子孫出而爲世用能軆方伯今日之意遵而勿替 오호세대천이기회이실계차이왕경유가자손출이위세용능체방백금일지의준이물체 傳之不朽則吾宗仁厚之風將期以千百世之久而綿綿不絶無媿於蘇氏之譜矣 전지불후즉오종인후지풍장기이천백세지구이면면부절무괴어소씨지보의 아! 세대는 바뀌어 기회를 잃기 쉬우니 이를 이어가면 다시 훌륭한 자손이 나와 세상에 쓰임이 되어 능히 방백의 금일의 뜻을 따라 움직이지 않거나 버리지 않고 전한다면 우리 일가의 어질고 후덕한 가풍이 장차 천백세 오래도록 기약하고 줄줄이 끊이지 않아 소씨의 족보에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壬辰五月十一代孫㮨再拜敬跋 임진오월십일대손직재배경발 효종3년(1652년) 5월일에 11대손 직(㮨)은 두 번 절을 하고 공경히 발문을 쓰다.
檜軒公派譜
8. 檜軒公派譜序회헌공파보서 (1961년)
夫族譜者는 同姓之謂族이요 敍倫之謂譜니 上承祖祖之昭穆하고 下繼孫孫之宗支 부족보자동성지위족서륜지위보상승조조지소목하계손손지종지 하야 編載於諸冊者也라. 無是면 何以知祖祖昭穆이며 何以知孫孫之宗支乎아 來歷 편재어제책자야무시하이지조조소목하이지손손지종지호내력 不知면 則禽獸無異리니 可不愼哉아 부지즉금수무이가부신재 대체로 족보라는 것은 성씨(姓氏)가 같은 집안의 동족을 차례로 적은 것으로서 윗대(代)를 이은 선조의 신주를 사당에 모신 차례와 아래 대(代)를 이어가는 자손의 종파(宗派)와 지파(支派)를 엮어 기록한 모든 책을 말한다. 이것이 없으면 조상을 사당에 모신 차례를어찌 알고 종파와 지파의 자손을 어찌 알 것인가. 내력을 알지 못하면 짐승과 다를 것이 없으니 소중히 여기는 것이 옳지 않을 가.
自古以來로 未有孝而忘其先하고 未有仁而遺其親故로 自王公至庶民히 莫不有譜 자고이래미유효이망기선미유인이유기친고자왕공지서민막불유보 法은 雖百世之後라도 未常忘追慕之誠하고 視敦睦之誼니 可不重哉아 법수백세지후미상망추모지성시돈목지의가부중재 예로부터 내려오면서 효도를 하지 않아 선조를 소홀히 하고 어질지 못하면 일가(一家)를 잊게되는고로 왕으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보법(譜法:족보의 법식)이 있으면 비록 100대(代) 후라도 항상 추모하는 정성을 잊지 않고 화목한 정분을 본받을 것이니 중하게 여기는 것이 옳지 않을 가.
惟吾全州之柳는 始掌令公하야 興於完山伯以後로 設譜孝墓壬辰에 初於一冊하고 유오전주지류시장령공흥어완산백이후설보효묘임진초어일책 英祖丙午에 再於四冊하고 正廟丙午에 三於十冊하고 高宗丙子에 四於十七冊하고 영조병오재어사책정묘병오삼어십책고종병자사어십칠책 甲子에 五於十冊中俱載吾先祖 갑자오어십책중구재오선조 생각하건대 우리 전주류씨는 장령공을 시작으로 완산백 이후에 일어나 효종3(1652)년에 최초로 임진보 1권을 간행하고 영조2(1726)년에 두 번째로 병오보 4권을, 정조10(1786)년에 세 번째로 병오보 10권을 간행하였으며, 고종13(1876)년 네 번째로 병자보 17권을 간행하고 1924년에 5번째로 갑자보 10(23)권에 우리 선조를 등재하였다.
鴻公 巨卿名儒碩德이 世世不絶하야 以識後人은 道溪公之休廕厚澤이 愈久愈新宗 홍공 거경명유석덕세세부절이식후인도계공지휴음후택유구유신종 支繁衍하야 其麗不億이언마는 當此之時하야 國土南北分裂하니 何望合譜哉리요 지번연기려불억당차지시국토남북분열하망합보재 홍공(鴻公), 많은 상대부(上大夫), 이름난 유학자와 덕이 높은 사람이 대대로 끊이지 않아 유식한 후손 도계공(류심)의 훌륭하고 두터운 은덕이 오래 오래 새롭게 더해가고 종파와 지파가 번성하여 불어나니 그 숫자가 억(億)은 안 되지만 현 시대를 맞이하여 남북이 분열되었으니 어찌 합보(合譜)를 바랄 수 있겠는가.
諸宗이 相議後 檜軒公派譜를 修成하니 規例는 一尊舊譜하고 尊祖敬宗之義와 進 제종상의후 회헌공파보수성규례일존구보존조경종지의진 先勉後之戒는 幷在先譜丨니 不敢贊一言하고 各派中에 基冕 基百 麟鎬 昌熙가 선면후지계병재선보곤불감찬일언각파중기면 기백 인호 창희 以此勤勞修譜하야 乃成編集하니 諸宗勉之어다. 이차근로수보내성편집제종면지. 여러 종친들이 상의를 한 후 회헌공파 족보를 편찬하는데 규례(規例)는 옛 족보를 존중하고 조상을 존경하고 종친을 공경하는 도리(道理)와 진선면후(進先勉後)의 계(戒)는 먼저의 족보와 합치는 것이니 너무 훌륭하여 감히 칭찬을 한 마디도 못하고 각파 중에서 기면, 기백, 인호 및 창희씨가 족보를 부지런히 가다듬어 편집을 마치니 모든 종친의 부지런함이 도다.
檀紀四二九四年辛丑流火月中浣日 完山伯十七代孫 信 謹敍 단기사이구사년신축류화월중완일 완산백십칠대손 신 근서 서기 1961년 (음) 7월 중순(中旬) 완산백(시조 류습)의 18세손 류신이 삼가 서문을 짓다.